걸인과 나환자의 아버지, 오방 최흥종 목사

걸인과 나환자의 아버지, 오방 최흥종 목사

[ 아름다운세상 ]

최샘찬 기자 chan@pckworld.com
2018년 05월 10일(목) 12:26
1950년대 무등산 신림마을 순회중인 최흥종 목사
걸인과 나환자의 아버지, 광주 최초의 목사 오방(五放) 최흥종 목사(1880~1966)의 신림기도처가 지난 4월 12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한국기독교사적 제35호로 지정됐다. 평생을 어렵고 굶주리는 사람들과 나환자를 돕는데 헌신한 최흥종 목사는 가족을 떠나 무등산에서 수련원을 짓고 걸인들과 살며 많은 복음을 전했는데 이곳이 바로 신림기도처(현 신림교회 오방수련원)이다.



# 성자의 지팡이 (1880~1912)

최흥종 목사는 1880년 광주에서 출생했다. 젊은 시절 '광주의 무쇠주먹', '최망치'란 별명으로 뒷골목에서 주먹을 휘둘렀던 그의 인생은 두 번의 만남을 통해 완전히 달라진다. 25살에 그는 미국남장로회 벨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 신앙을 얻게 됐고, 30살 포사이드 선교사를 만나 평생 한센병 환우를 돕는 삶을 살게 됐다.

최흥종은 1909년 겨울 목포에서 광주로 오는 포사이드 선교사를 마중 나간 일이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포사이드 선교사는 나병에 걸려 추위에 떨고 있는 한 여성에게 자신의 외투를 벗어 입히고 나귀에 태웠다. 그런 후, 나병에 걸린 여인의 지팡이를 주워달라고 최흥종에게 요청했다. 피고름 묻은 지팡이를 보며 한센병이 옮을까 망설였던 최흥종은 외국인보다 동포애 없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지팡이를 집어줬다. 성자의 지팡이로서의 그의 삶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 일을 계기로 최흥종은 날마다 선교사 촌에 나갔으며 나환자를 위한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최흥종은 월슨(우월순) 원장이 운영하는 제중원에서 나병환자를 돌보는데 몸과 마음을 바쳤다. 광주 양림동 선교사촌(제중원)에서 나환자를 보호하고 치료해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인근의 나병환자들이 몰려들었다. 1912년 숫자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환자와 걸인들이 몰려들자 최흥종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봉선동 땅 1000여 평을 내놓았다. 이곳에 지역 최초의 나환자 전문병원 '광주 나병원'이 세워졌고, 전국의 나환자들이 광주로 몰려오자 시민들의 항의가 빗발쳐 병원을 옮겼는데 그곳이 현재 여수 애양원이다.

오방 최흥종 목사와 의재 허백련이 함께 머문 춘설헌.


# 걸인과 나환자의 아버지 (1912~1933)

최흥종은 1912년 북문안교회에서 첫 장로로 취임하고, 1919년 3ㆍ1만세 운동에 연루돼 1년 4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출고 후 1921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광주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고 북문밖교회(현 중앙교회) 초대 목사로 부임했다. 1924년 남문밖교회(현 광주제일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고 광주 YMCA를 창간해 초대회장을 역임했다. 1929년엔 제주도 모슬포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다가 걸인들과 나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다시 광주로 올라왔다. 이후 목회활동을 하며 걸인들과 나환자를 헌신적으로 돌본 그는 '걸인, 나환자의 아버지'라 불렸다.

당시 나병환자들이 많아 국가의 관심과 치료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최 목사는 전국 나환자 집단수용시설과 치료시설이 필요하다고 조선총독부에 요구했다. 조선총독부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최 목사는 1932년 봄 광주에서 나환자 150여 명과 11일간 조선총독부까지 '구라대행진'을 시작했다. 행진 중 지방의 나환자와 걸인들이 참여해 서울에 도착했을 땐 500여 명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결국 최 목사는 총독 사무실에서 우가키 총독과 면담을 갖고 소록도의 나병환자 수용시설을 대폭 확충할 것과 치료를 받은 환자들이 갱생의 길을 가도록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 완전한 자유, 오방 (1935~1962)

최흥종 목사는 1935년 완전한 자유의 길을 선택했다. 거세 수술을 받고 본인의 사망통지서를 주위 사람에게 발송했다. "나 오방 최흥종은 죽은 사람임을 알리는 바입니다. 인간 최흥종은 이미 죽은 사람이므로, 나를 만나거든 아는 체를 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이 지상에서 영원히 떠나 하나님 품에서 진실로 자유롭게 살 것입니다. 본인을 사망자로 간주하시고 우인 명부에서 삭제하여 주시기를 복망하나이다."

이때 최흥종은 아호를 '오방'이라고 지었다. 오방은 다섯 가지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가족의 정에 얽매이지 않고, 사회적으로 구속받지 않으며, 정치적으로 자기를 앞세우지 않고, 경제적으로 속박 받지 않으며, 종파를 초월해 정한 곳 없이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는 5가지 신조를 평생 지키며 살았다.

육적 인간의 죽음을 선포한 그는 죽은 사람처럼 살았다. 집을 나와 사방을 판자로 막은 손수레를 만들어 '유산각'이란 이름을 붙여 끌고 다니면서 거리에서 걸인들과 함께 살았다.

최 목사는 1947년부터 무등산 자락의 오방정(현 출설헌)에서 의재 허백련과 함께 농촌지도자 양성하기 위해 삼애학원을 설립해 운영하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 사회적으로 냉대 받던 자들을 위해 나주의 음성나환자 자활촌 호혜원(1955) 설립, 결핵환자들을 위해 지산동 골짜기의 송등원(1958)과 원효사 골짜기의 무등원(1962) 등을 설립했다. 무등원 안에 '복음당'이라는 토담집을 짓고 결핵환자들과 함께 살기도 했다.



# 영원한 자유인 (1964~1966)

오방 최흥종 목사는 1964년 12월 30일 유언장을 남겼다. "교회를 다닌다고 혹 직분이 있다고 목사나 전도사나 장로나 집사라 하는 명칭으로 신자라고 자칭할 수 없고 예수와 연합한 자만 구원을 얻는 진리이다. 내가 보기에는 모든 자녀들이 경제적 질고에 노예가 되고 처자녀 등의 애착에 중점을 두므로 이중삼중으로 고뇌적 포로가 돼 해방될 소망이 희소하오니 어찌 가린애석치 않으랴. 용감히 회개할지어다.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이기고 예수를 따를지어다."

유언장을 작성한 후 최 목사는 1966년 2월 10일 "이제 살 만큼 살았으니 여한이 없다"며 단식에 들어갔고, 그 해 5월 14일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5월 18일 광주에선 모든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지고 '광주사회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됐다. 광주공원엔 무등산에서 내려온 결핵환자들, 나주 호혜원과 여수애양원에서 온 음성나환자 등 수백명이 몰려왔다. 그들은 "아버지,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며 땅을 치고 통곡했다.



최샘찬 기자 chan@pckworld.com



# 오만균 목사 인터뷰

"한국기독교사적으로 지정된 최흥종 목사의 신림기도처가 광주시 문화유적지로 지정되길 바랍니다. 평생을 나병환자와 걸인들을 위해 희생한 최흥종 목사의 숭고한 정신은 과거 미풍양속이 사라져 가는 이 시대에 꼭 필요한 가치입니다. 그의 삶이 크리스찬뿐 아니라 비기독교인들에게도 알려지길 바랍니다."

'오방 최흥종 목사 신림기도처 총회 사적지 지정 자료집'을 집필한 전남노회 역사위원회 서기 오만균 목사(광주호산나교회)는 최흥종 목사의 삶이 널리 알려지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하며, 신림기도처가 광주시 문화유적지로 등록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오 목사는 "최흥종 목사의 아호 '오방'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나병환자들과 함께 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인적이 드문 곳에서 사역해 알려지지 않았다"고 이유를 설명한 후, "최흥종 목사가 남종화의 대가 의재 허백련과 함께 머문 오방정(현 춘설헌)은 광주광역시기념물 제5호로 지정돼 있지만 최흥종에 대한 설명은 빠져 있어 그 흔적이 퇴색될 수 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는 "신림기도처가 시 유적지로 지정받기 위해 역사적 자료도 중요하지만, 기도원 농업학교터 허난설원터 삼애원 호애원 송등원 등 오방의 흔적을 연결해 테마여행을 할 수 있도록 역사탐방코스를 조명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문화재청의 복원작업을 거친 후 시 유적지로 지정된다면, 옛날 건물 모형과 함께 화장실과 주차장, 그 주변의 둘레길도 조성될 것이며, 5~10년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chan@pckworld.com





# 오방 최흥종의 일대기

1880년 광주시 불로동에서 출생

~'최망치'로 불리며 싸움꾼 생활

1904년 미국남장로회 선교사 벨을 만나 교인이 됨

1907년 세례받고, '최영종'에서 '최흥종'으로 개명

1909년 한센병 환자 위해 헌신한 포사이드 선교사 만남

1912년 한국 최초 나환자 요양소 위해 땅 1000여 평 기증

1919년 3.1운동 때 만세시위 중 3년 형을 받고 1년 4개월 옥고

1920년 광주 YMCA 창설, 기독교 청소년 운동에 앞장

1921년 평양신학교 졸업 후 광주 최초의 목사

1922년 북문밖교회(현 중앙교회) 초대 목사로 시무

1924년 금정교회(현 북문안교회) 시무

1924년 제14회 전남노회에서 노회장으로 선출

1924년 광주 금정교회(현 제일교회) 시무

1927년 신간회 전남지회장 역임, 항일 민족독립운동 전개

1929년 제주 모슬포교회 시무

1930년 제주노회 초대노회장

1933년 나환자 500명과 11일간 '구라대행진' 조선총독부 우가끼 총독면담

1935년 거세 수술, 호를 오방이라 짓고, 사망통지서 발송

1936년 무등산 자락 오방정(현 춘설헌)에서 의재 허백련과 기거

1945년 전남 광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한국 나예방협회 조직

1947년 김구선생에게 '화광동진' 칭호 받음

1947년 농촌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삼애학원을 설립

1956년 호혜원 설립 나주 음성나환자 자활촌

1962년 국민훈장 수여

1966년 2월 10일 단식 시작

1966년 5월 14일 86세 서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