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나라'와 '교회' 사이에 선 장애인 ②장애인 선교의 과제

'하나님나라'와 '교회' 사이에 선 장애인 ②장애인 선교의 과제

[ 특집 ] "장애인, 하나님의 완벽한 피조물"

이범성 교수
2018년 04월 10일(화) 14:29

장애인선교는 단지 장애인 돌봄이 아니다. 그리고 장애인을 교회에 나오게 하는 것만도 아니다. 게다가 장애인선교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를 위한 선교다. 장애인선교는 단지 봉사의 영역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배, 교육, 설교 그리고 친교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난다. 먼저 봉사에 대해 말하자면, 하나님나라를 전파하기 원하는 교회는 이 세상에 '착한 행실'을 보여주어야 하는데(마5:16), 그 '착한 행실'이란 우선 인구 열 명 중에 한 명꼴인 장애인을 위한 무장애공간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이다.

예배가 진행되는 강대상은 보행장애인이 독립적으로 다다를 수 있어야 한다. 시각장애인을 위해서는 점자성경책이 비치되어야 하고 청각장애인을 위해서는 수화통역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렇게 예배의 진행이 각종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배제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아멘, 할렐루야와 같은 예배에서 자주 사용되는 반응을 시각, 청각장애인도 함께 표현할 수 있는 각종 신호가 자연스레 사용되는 분위기가 되어야 한다.

교회의 교육은 외부적으로는 장애인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하며, 내부적으로는 장애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기초적으로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장애인신학이란 장애에 대한 하나님의 선한 계획에 대한 이해, 하나님이 구원사역에서 사용하신 장애(성육신)의 방법, 유기체로서의 교회를 구성하는 약한 지체의 중요성 등에 대한 인식 등을 말한다. 이 인식이 외부적으로는 교회교육 장소에 장애인의 접근성을 확보하고, 각 종류의 장애를 가지고도 교육시간을 지탱할 수 있는 학습자의 자리를 마련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설교는 내용적으로 주의를 요하는데, 장애를 죄의 결과로 해석하거나 장애인을 시혜의 대상자로 일반화하거나, 장애인에게 결여될 수도 있는 외모와 건강을 복의 기준으로 설정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장애인 신학자 울리히 바흐가 주장했던 것처럼 올림픽 최고기록의 운동선수나 이 시대 최고의 배우가 아니더라도 중증장애인 역시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대로 한 치의 오차 없이 창조하신 완벽한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설교는 세상의 성공신화를 복음에 입히는 작업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을 전복하는 하나님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선포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교회의 친교는 하나님나라의 표현이다. 하나님나라의 새로운 가치관 위에 세워진 교회는 개인의 능력이 최고의 가치를 인정받는 관계가 아니라 가족의 구성원이라는 존재 자체가 가장 중요한 가치를 갖는 관계이고, 약한 지체는 더욱 아름답게 치장해 주는 공동체이다. 개인의 능력은 서로를 위해서 사용될 때에 가치가 있는 것이지, 그 자체로서 내세울 수 있는 아무런 가치도 아니다. 교회의 능력은 약한 자들에게서, 그리고 이 약자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에게서 경험한다. 강한 인간의 능력은 다만 순간적인 도구로 사용되는 경우가 간혹 있을 뿐이다.

장애인 사역은 지역교회의 친교를 통해서 이루어지면 좋겠다. 우리 교회는 시각장애인, 이웃 교회는 청각장애인, 또 다른 교회는 발달장애인 등으로 교회의 장애인 사역을 특화하되, 사역을 분할, 공유하는 모습으로 말이다. 장애인선교는 이러한 연합 사업을 통해 모든 분열된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한 몸에 속한 지체라는 것을 표현해 낼 수 있다. 

교회들의 에큐메니칼한 '착한 행실'은 "그들(교회)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가운데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예수)를 보내신 것을 믿게"(요17:21) 만들 것이다. 그리고 장애인교회가 별도로 존재하기 보다는 하나의 '교회 안에 작은 교회'가 되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드리는 주일 낮 예배와 구역, 선교회 모임, 그리고 장애인의 특성에 맞추어 별도의 성경공부와 특별활동이 진행되는 통합교육 형태가 바람직하다.

장애인선교가 비장애인에게 왜 필요한가? 장애인을 돌보기 위해서라는 것은 단지 여러 이유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교회의 비장애인은 장애인과 더불어 성공적인 공동체를 만듦으로써 만년 '세상보다 지혜롭지 못한' 사회적 후진성을 벗어나서 세상의 윤리와 가치관을 선도할 위치에 서게 된다. 

교회는 항상 불안정한 그 시대의 정신 앞에 하나님나라의 윤리와 가치관을 제시할 때에 공적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 교회는 자주 각 시대의 가치에 편승하여 세속의 가치를 좇으며 세속적 방법으로 경쟁하다가 하나님나라를 선교할 수 있는 기반을 상실하곤 해왔다. 우리의 교회와 목회자 그리고 교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열심이 아니라 회심'이다.

정녕 한국교회의 위기가 등록교인의 숫자가 줄어든 것이라는 말인가? 소수자의 교회가 된다는 것은 위기가 아니다. 개혁되어야 했던 중세의 교회는 다수자의 교회였다. '전국 복음화'를 넘어 대륙이 복음화된 교회였고, 성직자의 권위가 세속의 질서를 주무르던 교회였으며, 교회 밖으로부터의 후원을 기대할 필요가 없는 부유한 교회였다. 그런데 종교개혁 오백주년을 기념하는 우리가, 지금 부러워하는 교회가 바로 우리가 반대했던 그 부패한 중세교회가 아닌가? 진정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는 우리의 진심이던가? 지금도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에큐메니칼운동을 대형교회를 등에 업고 치루는 우리 종교개혁의 후예들은 정녕 소수자의 초대교회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가? 중세교회에 대한 반대자들(Protestants)의 후예들은 지금 부패한 중세교회를 그리워하고 있다. 장애인이 나오지 않는 장애교회에서 말이다.

장애인은 모든 '하나님을 적대하는 사고'와 시대정신이 제공하는 가치관을 하나님나라의 가치관에 대비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대칭시켜 놓고 마치 한 쪽은 옳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적대하는 사고와 하나님나라의 가치관을 거부하는 마음은 장애인에게도 비장애인에게서와 똑같이 자리하고 있다. 많이 탕감 받았다고 남에게 받을 적은 빚을 탕감해주는 것이 쉽지 않다(마18:23~34). 장애인 역시 비장애인과 다르지 않게 갑질을 하고, 약자를 괴롭히며, 명예욕에 불타고 있다. 장애의 유무로 장애 적대적 사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법은 없다. 장애인신학은 계급투쟁의 이론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는 장애인의 편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만 자신을 계시하셨던 (구약)시절에도 약자의 편을 드는 분이셨다. 승천하신 이후에는 소자들 중에 계시면서 소자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주시고, 이렇게 평상시에 소자들과 만나던 사람들을 구원하신다(마25:31~46). 사람이 되어 기꺼이 장애를 입으신 하나님이 장애인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누가 그 하나님이 옳지 않은 처사를 한다고 감히 말하겠는가? 

부활하신 예수는 소자들을 무시하던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그만 머물고 갈릴리로 가서 다시 시작하자고 말씀하신다. '어서 소자에게 가라!'고 하시고 이미 '소자들 중에 내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두 가지 임재방법을 우리가 애써 모른 체하지 말자. '하나님나라'와 '교회' 사이에 선 '장애인'은 하나님나라 선교를 돕기 위해 예수님과 함께 교회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범성 교수
실천신학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