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나라'와 '교회' 사이에 선 장애인 ①기독교 세계관으로 본 장애인

'하나님나라'와 '교회' 사이에 선 장애인 ①기독교 세계관으로 본 장애인

[ 특집 ] "장애인, 구원 역사의 중요한 도구"

​이범성 교수
2018년 04월 03일(화) 15:28

지난 3월 9일 필자는 교회 장애인교우들과 오전에 강릉을 갔다. 평창패럴림픽의 개막식을 참관하고 아이스하키 한ㆍ일전을 응원하기 위함이었다. 교회 장애인부가 올해 동계수련회를 패럴림픽 참관을 중심으로 계획했던 것이다. 일박 수련회의 주제는 '패럴림픽과 교회'였다. 열흘 동안 열린 패럴림픽에 교회의 이름으로 참관한 것은 비단 우리교회만이 아니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에 소속된 여러 교단들의 교회들이 의기투합하여 선교적 차원에서 각자 가능한 일시에 평창으로 향했다. 올림픽 개최지역에서 예배와 기도처소를 만들고 전도지를 돌리는 일은 그 지역에 있는 교회의 몫이었다. 우리는 다만 개막식을 축하하고 경기를 응원했을 뿐이다. 우리가 일반 관람객들과 달랐던 것은 35인승 교회버스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반반씩 총 23명으로 휠체어 열대를 싣고 리프트도 없는 버스를 힘들게 오르내리고 환승정거장에서 다시 셔틀버스를 갈아타고 어렵게 구매한 경기장 장애인 지정석과 보조의자 위로 물이 떨어지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힘차게 박수치고 열심히 응원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나라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우리는 개막식과 아이스하키 경기 사이의 둘째 날 오전에 '패럴림픽과 교회'라는 주제로 집회를 했다. 우리끼리의 집회였다. 하나님나라는 장애인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생활하는 곳이라고 우리는 성경 누가복음 4장 18절과 7장 22절을 해석했다.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에 있어서 지속적인 불편을 갖는 사람"이 장애인에 대한 사전적 정의인데, 그렇다면 이 땅 위에서도 하나님나라의 경험은 장애가 극복되는 현장 경험인 것이다. 우리는 패럴림픽이 국민적 큰 관심 속에서 성사되는 것과 우리가 교회로서 이 일에 한 몫을 감당할 수 있기를 염원했으며, 참관하여 응원하는 중에 우리가 이 큰 운동회를 성사시키는 주체라는 것을 느끼고 싶었고, 이러한 적극적 참여를 계기로 이 사회에 책임적이고 자주적인 시민으로서의 역량을 키우기 원했다.

우연한 기회로 2017년 10월 26일에 대한장애인이천훈련원에서 열린 2018 평창패럴림픽 국가대표 발대식에 참석했던 필자는 30년 전인 1988년에 있었던 서울올림픽을 기억에 떠 올렸었다. 그 한 해 전인 1987년에도 시민들이 대거 참여한 성공적 민주화 시민운동이 있었는데, 이번 올림픽에도 그 한 해 전인 2017년에 촛불을 든 성공적 민주화 시민운동이 있었지 않았는가! 나는 1988년 올림픽 당시 신대원 재학생 전도사로서 우리나라 장애인선수들의 피눈물을 보았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마련한 곰두리 올림픽(패럴림픽)평가회에 초대된 우리나라 장애인선수들은 다른 나라 선수들처럼 올림픽을 축제로 즐길 형편이 못되었으며, 오직 메달을 따서 연금수혜자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나 운동장비의 현격한 수준차이로 도저히 경기를 제대로 운영할 수 없었던 아픔을 그 자리에서 토로하고 있었다.

기독교가 추구할 것은 교회 자신의 영화가 아니고 하나님나라이다. 프랑스의 구교신학자 르와시는 "예수께서 전하신 것은 하나님나라인데 이 세상에 남은 것은 교회 밖에 없다"는 말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한다. 교회가 하나님나라를 말하고 경험하고 보여주려면 먼저 교회 안에는 세상과 다른 가치관이 통용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세상에서는 권세 있는 자가 지배하지만 "너희들 가운데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한 몸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약한 지체는 전체 중에서 더욱 요긴한 지체이고,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으로 치장해 주는 법이라는 것이다(고전 12:22~27). 교회가 하나님나라를 증언하고 증거하려면 교회 안에는 세상과 다른 '대조사회'(Kontra Gesellschaft)의 가치관과 윤리가 먼저 형성되어야 한다. 누가 높으냐는 제자들의 서열다툼에 "나는 너희들 가운데 '섬기는 자'로 있다"고 하시며, 제자가 선생만 같으면 족하지 않겠느냐고 하신 것이다. "이 세상에 남은 것은 교회 밖에 없다"고 지칭된 그 교회에는 소자가 안 중요할지 몰라도 "예수께서 오셔서 선포하신" 그 하나님나라에는 소자가 중요하다. 

필자는 선교가 선포와 봉사로 이루어진다고 표현한 데이비드 보쉬의 표현에 동의하지만, 호켄다이크가 이미 언급한, 선교에 선포(설교)와 섬김(봉사)과 더불어 친교(관계)를 포함한 것에 주목한다. 하나님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선포와 그 하나님나라를 경험하게 만드는 봉사는 하나님나라가 '천당'을 보장하는 개인구원의 수준의 무엇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이루어야하는 관계적 구원사건이라는 것을 친교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선포되고 경험되고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나라에 장애인은 어떤 특별한 관계가 있을까? 제자들을 보내서, 오실 그분이 당신이냐고 질문하던 세례요한에게 예수께서는 장애가 극복되는 이 현장을 가서 보고하면 (하늘나라를 시작한 이가 왔다는 것을) 요한이 알 것이라고 답을 주셨다(마 11:5). 그러니까 장애인은 하나님나라가 도래했다는 것을 알리는 전령이 된 셈이다. 

이 하나님나라를 가장 사모하여 대망하는 사람들도 장애인이다(막 2:17). 예수는 하나님나라 사역을 하시는 대부분의 시간을 장애인과 함께 계셨다. 그러므로 예수의 자리는 강한 자들의 '기독교왕국'에서 찾을 수가 없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은 약한 자들이 중심이 되는, 즉 "유대인에게 거리끼고 이방인에게 미련하게 여겨지는 복음"(고전1:23)이며 이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고 동의하기 싫어하는 "해 아래 새로운" 소식이고 가치관인 것이다. 니체가 처음 들어봤다고 하는 기이한 말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 복음이며, 장애인이 중심이 되는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서 구현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분이라고 믿는다면, 장애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루어지는 일이다. 요한복음 9장 3절의 시각장애인 개안기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다. 신이 인간이 되신 성육신은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장애를 입으신 사건이다. 하나님은 장애를 하나님나라를 우리 가운데 가져오시기 위한 구원 역사에 중요한 도구로 사용하신다. 하필이면 왜 내가 장애인이 되어야 하냐는 항변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위대한 일에 쓰임 받는다는 믿음으로 대답이 될 수 있을까? 장애인신학자 울리히 바흐는 사자가 귀여운 토끼를 찢어 배를 채움을 허락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지라면 어쩌겠느냐고 반문한다. 하나님나라에 초대된 교회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친구가 되고 동료가 되고 가족이 되는 곳이어야 한다. 선교의 결과는 친교라는 뜻에서 예수님의 새 계명을 이해할 수 있다(요 13:34).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교회가 장애인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이 교회를 위해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가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나라의 상징이 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나라'와 '교회' 사이에 선 '장애인'은 교회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도록 도와야 한다.

이범성 교수
실천신학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