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처럼 변함없는 좋은 이웃 되어주죠"

"예수님처럼 변함없는 좋은 이웃 되어주죠"

[ 우리교회 ] 서울서북노회 원당교회

표현모 기자 hmpyo@pckworld.com
2018년 03월 26일(월) 18:56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에 위치한 서울서북노회 원당교회에 김광철 목사가 부임한 것은 1987년 2월 27일이었다. 임진강 건너 민통선 안에 위치한 곳에 있다보니 부임 당시 버스가 하루 3번 왕래할 정도로 낙후한 지역이었다. 비포장도로에 수많은 검문소를 뚫고 오느라 서울에서 오전 9시에 출발한 이삿짐 차는 해가 질 무렵인 오후 5시가 되어서야 도착했다. (당시에는) 젊은 김 목사 부부를 처음 만난 동네 이웃의 첫 인사는 다음과 같았다.
"먼데까지 와줘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사는 언제 가실겁니까?"

전임 목회자들이 1년여 남짓 목회하다가 타지역으로 가고 마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보아 왔던 터라 그 이웃 또한 그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 이에 김 목사는 꼭 장기 목회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김광철 목사의 원당교회 목회는 현재 30년을 넘어서고 있다. 

각오를 단단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첫 정착은 쉽지 않았다. 외부인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환경에 북한에서는 엄청난 데시벨의 대남방송이 하루 평균 18시간 시끄럽게 방송되고 있었다. 뱀은 또 어찌나 많던지 부임한 첫해에 잡은 뱀만 70마리였다고 한다. 한번은 살모사가 집 안까지 들어온 적까지 있다고. 장남면 실제 거주 인구가 350여 명밖에 되지 않아 교회성장은 꿈꾸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부임 전에는 구원파로 인해 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목회자들이 1년도 못되어 떠나가는 일이 반복되는 통에 성도들도 마음을 쉽게 주지 않았다.

지역에 만연한 미신을 타파하는 일도 큰 과제였다. 원당리는 매년 대동굿이 행해지며, 그때마다 지역의 모든 집에서 쌀을 낼 정도로 미신이 팽배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 목사 부부는 제일 먼저 지역주민들의 농사일을 돕는 것부터 시작했다. 사실 당시 돈이 너무 없어 농사일을 도와주면 끼니 정도는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고 한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커피나 음료수를 준비해 이집 저집 찾아다니며 모판에 흙담기를 하루에 몇 만장씩 하곤 했다. 

김 목사는 "추수하는 곳은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나한테는 전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의 장소"라고 말할 정도다. 김 목사는 초창기부터 교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마을목회를 전개해 나갔다.

일단 동네의 애경사에는 무조건 참석했다. 교인이 아니어도 상을 당하면 무조건 찾아갔다. 지역주민들은 교인이 아니더라도 김 목사에게 가족이나 친척의 하관 예식 혹은 장례예식을 부탁하기도 한다. 

성탄절에는 전 지역 350여 호에 이르는 모든 집을 찾아 교인들과 새벽송을 돈다. 찬양을 부른 뒤 양말을 포장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전달하면, 주민들은 사탕과 라면, 초코파이, 헌금 등을 전한다. 모인 선물과 헌금은 장애인 시설, 군부대, 4개 부락의 노인정, 교인 중 어려운 이들에게 모두 나눈다. 추수감사주일에는 마을 주민들을 초청, 함께 예배드리고 음식을 나누고 있다. 다문화 가정을 대상으로는 한글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지역 음식점과 연계해 2개월에 한번씩 장애인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있고, 노인정과 장애인 재활시설에는 주기적으로 찾아가 봉사하고 있다.
연천군 체육대회가 열리면 성도들이 함께 찾아가 자원봉사를 하고, 지역 방위협의회에도 적극 참여해 군인들의 농촌 일손돕기도 추진한다.

매년 5월에는 연천군이 주관하는 구석기 축제와 9월초에는 통일바라기 축제(해바라기 축제)에 동참해 풍선아트 체험, 페이스 페인팅, 케리커쳐 그리기 등 봉사활동도 진행한다.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선교에도 열심이다. 송계ㆍ평촌ㆍ묵곡ㆍ모레교회 등 국내 농촌교회 4곳을 후원하는 것은 물론, 인도네시아 발리에 큰사랑고아원과 모퉁이돌고아원을 후원하고 있고, 성인이 되어 고아원을 나가야 하는 이들 중 학생 6명의 대학진학을 지원하기도 했다. 동북아시아의 선교사 지원 및 신학교 지원도 한다. 북한과 인접해 있는 교회의 특성 답게 한달에 한번씩 북한을 위해 기도하는 모임인 N사랑선교회의 활동에도 열심으로 참여한다.

▲ 기윤실 좋은교회상 시상식에 참여한 교인들.

김 목사의 헌신적인 마을목회는 서서히 빛을 보게 되어 부임당시 10여 명밖에 되지 않던 교인은 어느덧 60여 명으로 늘었다. 주민들이 적어 극적인 수적 증가는 어려울 지 몰라도 마을 내 원당교회는 이제 단순한 종교시설이 아닌 친구이자 진정한 이웃이 되었다. 

1987년 부임할 때부터 있었던 무당은 몇년 전 "나는 할 일을 다 했으니 원당교회나 가라. 목사님 내외가 좋은 분들인 것 같더라"는 말을 주민들에게 남겼다고 한다. 동네 굿도 없어지고, 그 무당도 권사가 되었다고 한다.

2016년에는 기윤실에서 주최하는 '지역교회와 함께 하는 좋은 교회상'을 수상하며 30여 년 지역사회를 섬기는데 최선을 다한 김 목사와 성도들에게 큰 격려가 되기도 했다.

"부임한 첫날 우리 부부에게 언제 이사갈거냐고 묻던 어르신이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요. 아무리 전도해도 교회에는 안나오시더니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예수 믿고 평안하게 돌아가셨어요. 우리 부부는 은퇴할 때까지 이곳에서 지역 주민들과 깊이 사귀며,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싶어요. 예수님이 우리의 친구 되어주신 것처럼 말이예요."

#<김광철 목사 인터뷰>
"주민들과 동고동락 30년 감사뿐"

"제 비전은 교회 뿐 아니라 지역 전체와 함께 공동체를 이루는 거예요. 이번 회기

총회 주제가 마을목회인데 사실 저는 오래 전부터 마을목회를 지향해 왔어요. 집사람과 저 사이에 자녀가 없지만 그런만큼 지역의 아이들이 제 아이들이고, 지역 사람들은 제 친구고 친척입니다."

김광철 목사가 시무하는 원당교회의 성도는 60명 가량이지만 그는 350명 가량의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한 목회를 하고 있다. 

그와 아내 최미희 씨의 지역 정착기를 듣고 있자면 짠한 마음이 절로 든다. 수많은 농사일과 마을주민들의 애경사를 다 챙기고, 심지어는 자녀들의 대학진학에 관심이 없는 부모들을 설득해 대학을 보내기도 했다. 이 정도가 아니다. 멀쩡하게 부모와 집이 있는 아이들에게 집을 개방해 아이들은 몇년씩 김 목사의 집에서 먹고 자고 공부하며 성인이 될 때까지 뒷바라지 하기도 했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등록금이 없으면 서울의 교회에서 설교를 한 뒤 사례비를 받지 않고 교회 학생의 대학 등록금을 위한 장학금을 부탁하기도 했다. 이들은 김 목사 부부의 기도와 바람대로 잘자라 목사, 교사, 사업가, 미국변호사, 공인회계사 등이 되었다.

부임 당시 교회 1년 예산이 430만원이었는데 2년 후 1000만원이 되자 자립을 선포했다. 목회 사례비는 한달에 10만원이었다. 

가슴 아픈 사연도 많았다. 도회지로 나간 자녀들이 손자들을 조부모에 맡기는 경우가 많은데 한 할머니가 맡아 키우던 손자 둘이 수영을 하다가 한꺼번에 익사하는 사건이 있었다. 할머니는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강물에 몸을 던졌는데 김 목사의 아내가 강으로 달려가 할머니를 끌어냈다. 그 과정에서 강바닥 자갈에 무릎을 꿇고 사투를 벌이다 시피 해 무릎 연골이 망가져 지금까지 다리가 불편하다. 자궁 절제 수술로 임신 확률이 극히 적은 상태였는데 기적적으로 임신한 아기까지 유산되어 부부는 지금까지 자녀가 없다.

이렇게 헌신적으로 지역주민들을 섬기다 보니 사택이 살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자 면장의 배려로 새롭게 사택을 지을 수 있었다. 특히 새 예배당 건축시에는 이들의 고군분투에 마음 아파하는 집안 친척의 도움을 얻어 건축을 할 수 있었다. 헌당 예배를 일주일 앞두고 예배당 내부의 음향기기, 성구, 의자, 피아노, 에어콘 등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망연자실 하고 있을 때는 동네 노인정과 부녀회, 동네 주민들이 헌금을 해주어 내부 집기들을 채울 수 있었다. 비신자들의 헌금이 3분의 2가 될 정도였다고 하니 원당교회가 마을주민들에게 어떤 사랑을 받고 있는지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다.

김 목사는 "30년 세월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겠는데 지나보니 참 재미있었다"며 "앞으로도 동네 주민들과 더불어 살면서 선교의 사명을 끝까지 잘 감당할 수 있기를 소원하며 날마다 감사함으로 살아가고 싶다"고 바람을 피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