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3월 26~31일

[가정예배]3월 26~31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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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3월 21일(수) 17:23

월-룻과 보아스 가정처럼
본문 : 룻 4:13~17
찬송 : 357장

성경은 사람들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부지런히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신명기서는 많은 구절에서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기 위해 주의 말씀을 늘 자기 옆에 두고 읽으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에서 먹고 마시며 여호와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라, 요단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자녀들에게 이 말씀을 듣게 하여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하라'고 말씀한다. 왜 성경은 '여호와 경외하는 삶을 배우라!'고 강조할까? 이 질문에 대답하듯 시편128편 1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시편128편 2~6절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살아갈 때, 그들의 인생이 복되고 가정이 행복하며, 그들의 아내들과 자녀들의 삶이 평강할 것이라고 말씀한다. 그 아름답고 탐스러움을 128편은 결실한 포도나무와 어린 감람나무에 비유하고 있다.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복되고 탐스러운 인생, 결실이 풍성한 가정을 원한다. 가정이 평안하고,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자녀들이 잘 되는 복을 원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복된 가정을 이루어 가기 위해서는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어떻게 가정을 꾸려나가느냐가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참 모델이 되는 좋은 가정을 구약성경에서 보게 된다. 룻기에 등장하는 룻과 보아스의 가정이다. 룻기의 배경인 사사시대는 한 마디로 방향감각을 상실한 시대였다.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적 기준을 잃어버리고 사람마다 각각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시대가 사사시대였다. 그런데 룻과 보아스는 그 어두운 시대 속에서도 여호와 경외하는 삶을 살기 위해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룻은 이방의 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룻기 1장 15~18절을 보면, 남편이 죽고 홀로 남게 된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남편의 고향이자 시어머니의 고향인 유대로 돌아가면서 "어머니의 고향 어머니의 하나님께로 나도 함께 가겠다"고 그의 신앙과 믿음의 길을 고백하고 결단한다. 보아스는 또 어떤가! 보아스는 청상과부로 고향에 돌아온 나오미와 룻에 대하여 율법의 고엘 제도가 규정하는 책임을 져야할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니었음에도 자신이 앞장 서서 룻의 집안의 이 안타까운 사연을 해결하기 위해 수고했고, 결국 룻을 아내로 맞이하여 이 두 아름다운 믿음의 남녀가 가정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이 가정을 통해 다윗의 혈통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이어지게 된다. 우리 가정이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가정, 세상이 아무리 혼탁해도 하나님의 말씀의 길을 따라 살아가며 여호와 경외하기에 힘쓰는 믿음의 가정이 되어 우리 가정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게 되기를 바란다.

오늘의 기도
어두운 시대에도 우리 가정이 룻과 보아스의 가정처럼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가정이 되게 하셔서, 여호와 경외하기를 더욱 배우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구영규 목사
송전양문교회


화-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본문 : 시 121:1~8
찬송 : 490장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치 않은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한계가 있다. 아무리 마음으로 간절히 원한다 하더라도 내 힘과 능력으로는 안 되는 일이 훨씬 더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능력을 얻으려고 수고하고 땀을 흘리지만 여전히 한계가 있다. 그러기에 두려워하고 염려한다.
본문은 그런 연약한 인생을 바라보며 진정한 인생의 도움이 어디로부터 오는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며 스스로 해답을 찾아나가는 신앙고백이다. 동시에 우리 인생의 진정한 도움이신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는 내용이다. 시인은 1절에서 인생의 도움을 바라보며 산을 향하여 눈을 들겠다고 결단한다. 히브리인들에게 산이란 불변성과 영원성을 상징하는 곳이다. 또한 산은 종종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예루살렘의 거룩한 산 시온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한 희망을 걸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도우실까?
첫째로 실족치 않게 하신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신다는 것이다. 무거운 짐을 지고 가다보면 짐의 힘에 못 이겨 넘어지려 할 때가 많다. 그 때 누군가 붙잡아 주면 넘어지지 않고 잘 걸어갈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능력의 오른팔로 우리를 붙잡아 주신다. 하나님이 붙잡아 주시면 어떤 광야 속에서도 넘어지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짐을 가볍게 지고 갈 수 있다. 둘째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지켜주신다. 이 말씀은 그만큼 세밀하게 깊은 애정과 사랑으로 돌보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양들처럼 목자의 보호가 필요한 존재이다. 사람은 아무리 사랑해도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기에 언제나 함께 할 수 없다. 눈 앞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어떻게라도 해보겠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해볼 도리가 없다. 그래서 불안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순간도 우리로부터 눈을 떼시는 일이 없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기에 우리의 진정한 도움이 되시는 것이다. 세 번째로 우편에서 그늘이 되어 주신다. 사막지방에서 그늘은 강한 햇볕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휴식처로 참된 보호가 되심을 말하는 것이다. 낮의 해와 밤의 달 어떤 상황 속에서도, 때로는 애굽이나 메소포타미아지역의 강대국들로부터 택한 백성을 지키신다는 것이다. 네 번째로 환난에서 지켜주신다. 결코 환난을 당하지 않게 하신다는 말씀이 아니다. 환난이 있지만 어려움이 있지만 그것으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 속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이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이다. 날마다 믿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고 이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시길 바란다.

오늘의 기도
오늘도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소서.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의 눈이 흔들리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조영준 목사
태안교회


수-실로암, 보냄을 받은 사람들
본문 : 요 9:5~7
찬송 : 528장

소경이 눈을 뜬다. 이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야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이 오셨다. 그러나 아무도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오직 눈뜬 사건에 관심이 쏠려 있다. 도대체 어떻게 눈을 뜬 것이냐?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눈뜬 사람에 대한 애정이 아니다. 다른 장님의 눈을 뜨게 해주겠다는 자비도 아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세상의 여론이 자기들을 벗어나 이 눈뜬 장님과 눈을 뜨게한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에 대한 시기심일 뿐이다.
세상에 여러 가지 이슈를 점령하기 위한 술수를 본다. 그러나 그 속에는 사랑도 자비도 아닌 오직 자기를 드러낼 야욕이 보인다. 사랑으로 때리는 매는 상처가 남지 않는다. 그러나 위선의 칭찬은 사람이 싫어지게 한다. 바리새인이 장님의 고통은 뒤로하고 장님이 장님된 이유를 묻는 이슈를 던질 때 예수님은 느닷없이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은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신다. 이는 장님을 향한 사랑이다. 그에게 빛을 찾아주겠다는 선포인 것이다. 그리고 땅에 침을 뱉어서 진흙을 이긴다. 그 눈에 바르시고는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신다. 가서 씻고 장님은 눈을 떴다. 세상의 빛을 확인한다. 이 장님에게 예수님은 진실로 빛이 되었다. 이전에 장님이었으니 당연히 주님의 얼굴을 알 수가 없다. 분명한 것은 그가 실로암으로 보냄을 받았고 그래서 갔고 빛을 찾아서 돌아온 것이다.
실로암은 샘이 아니다. 히스기야시대에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 기혼샘에서 성안으로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판 히스기야터널을 통해서 흘러온 샘물이 고이는 연못이다. 이 연못은 예루살렘 성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비상시에 생명줄이었다. 비가 자주 와서 물이 넉넉한 시절에는 그리 중요한 시설이 아니다.
실로암으로 보냄을 받은 시각장애인은 먼저 이전의 어둠의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된다. 보냄을 받은 자가 가장 은혜를 입는다.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누리게 된다. 본래부터 보는 사람은 그 감격을 잘 알지 못한다. 예수님은 이것을 정확하게 지적하신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세상에서 보고, 듣고, 능력 있음이 죄일 수 있다는 선언이다. 왜 그런가? 주님께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보냄을 받은 사람은 보내신 주님이 하신 일을 증거하게 된다.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이보다 더 큰 자랑은 없다. 내 눈을 뜨게 해 주신  분이 예수님이다. 보냄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가장 큰 은혜를 누린다.

오늘의 기도
나를 믿지 않는 가정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 세상에, 교회를 향하여 손가락질 하는 이 땅에 보내주심을 감사합니다. 믿음에 눈뜸만으로 세상이 밝고 기쁨이 넘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강석보 목사
넉넉한교회


목-이것은 내 몸이니라
본문 : 막 14:22~26
찬송 : 251장

본문은 유월절이 성찬으로 바뀌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유월절을 마감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친히 우리의 유월절 양이 되셨다. 또한 성찬을 제정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자신의 몸과 피를 아낌없이 우리에게 주셨다.
첫째, 이것은 내 몸이니라. 이전에 유월절을 지키면서 먹는 떡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떡의 의미가 새로워졌다. 예수님은 떡의 의미를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이것은 내 몸이니라." 바로 이 시점에서 성찬이 유월절을 대신하게 되었다. 성찬에서 우리가 먹는 떡은 더 이상 단순하게 누룩이 없는 떡, 곧 무교병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찬에서 우리가 먹는 떡은 예수님의 몸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을 행할 때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성찬을 통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기념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기의 몸을 주셨다. 우리도 우리의 몸을 드려, 기쁨으로 예수님께 헌신해야 한다.
둘째,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유월절의 잔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할 때, 그들의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유월절 양의 피를 뜻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잔의 의미를 바꾸셨다. 성찬의 잔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예수님의 피, 곧 언약의 피를 의미한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흘리신 피를 가리켜 언약의 피라고 부르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기 위해서는 피를 뿌려야 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짐승을 잡아서 그 피를 뿌렸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이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곧 내가 너희를 위하여 내 피를 흘릴 것이다. 너희는 내 피로 모든 죄를 사함 받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피로 하나님과 새 언약 곧 영원한 언약을 세우게 될 것이다."
셋째, 새 것으로 마시는 날이 있다. 예수님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하시면서, 자신의 말씀을 강조하셨다. 이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마음에 확실한 소망을 심어주시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자신이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언제까지 예수님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않으실까?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이다. 우리를 위해 자기의 몸을 주신 예수님을 늘 기억하며 감사해야 한다. 또한 우리를 위해 자기의 피를 흘리신 예수님을 항상 기억하며 찬양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언제나 기억하며 소망해야 한다.

오늘의 기도
나를 위해 몸과 피를 흘려주신 주님의 사랑을 깊이 만나는 시간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서영임 목사
산울교회


금-말씀의 열매
본문 : 창 1:9~13
찬송 : 496장

요즘 아이들은 손에 흙을 묻히지 않고, 땅을 밟지 않고 생활한다. 아이들의 손에는 항상 스마트 기기가 들려있고, 그들이 걷는 길에서는 흙을 밟을 수 없다. 30~40년 전만 해도 땅에다 그림을 그려놓고 놀이를 했다. 땅에 돌을 놓거나 던지며 해가 지는 줄 모르고 놀았다. 흙에서 뒹굴며 노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절이었다. 그 자연스러움을 많이 잃어버렸다. 시골길에 자동차가 지나가면 흙먼지가 일어 눈을 뜰 수 없었다. 신작로라고 일컫는 비포장 길을 등교하며 공부했다. 그 길이 왜 '비포장도로'여야 할까? 신작로가 자연도로요, 시멘트나 아스팔트 포장길을 '비자연도로'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인간의 삶에 무엇이 자연스러움인가? 우리는 자연스러움에 대한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다.
손에 흙을 묻히고, 흙에서 나는 것을 먹고,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움이다. 성경은 인간이 흙으로 지음 받았고, 흙에서 나는 것을 먹고 살다가, 흙으로 돌아간다고 말씀한다. 우리는 흙과, 땅을 인간의 삶과 분리될 수 없는 관계 안에서 보아야 한다. 농부의 계절 봄이 왔다. 땅 위의 농부들의 움직임이 부산하지만 이도 옛 모습이다. 농부보다 농기계들이 더 바쁘게 움직인다. 그러나 봄철에 씨를 뿌리는 일로 분주한 것은 분명하다. 땅에 많은 씨들이 뿌려진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 땅은 뿌려진 씨앗의 종류를 따라 열매를 맺을 것이다. 농부가 의심 없이 기대하는 바이다. 하나님께서도 의심 없이 기대하는 바가 있으실 터이다.
사람이 흙과 친하게 살아가는 것, 뿌려진 씨앗이 종류대로 열매를 맺는 것이 자연스럽다. 오늘날 수천 년을 이어온 이 자연스러움이 많이 전도되고 있다. 계절 없이 농산물을 신선하게 먹을 수 있다. 그러나 땅에 뿌려진 씨앗이 종류대로 열매를 맺는 것의 자연스러움은 거역할 수 없고, 거역해서도 안 된다. 성도의 신앙생활도 자연스러움을 회복해야 한다. 주객이 전도된 우리의 삶도 본래의 삶으로 회복해야 한다. 농부로 비유하여 말씀하신 주님의 기대를 기억하자.
농부가 뿌린 씨는 그 종류대로 열매를 맺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이고 명령이다. 성도의 마음 밭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이 그 종류대로 열매를 맺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어찌 이 진리를 막을 수 있는가? 우리는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말씀에 먼저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각기 종류대로' 열매 맺는 것이 우선이다. 순종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열매를 많이 맺기를 사모하자.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은 두 번째 문제이다. 일단 말씀이 가진 본연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좋은 땅은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아니라 열매가 있는 나무를 내는 땅이다.

오늘의 기도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주옵소서. 말씀대로 열매를 맺되, 은혜를 따라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범희 목사
늘푸른교회


토-순종의 결과
본문 : 창 26:1~5
찬송 : 595장

우리의 삶을 되돌아 보면 잘한 일, 후회가 되는 일, 아쉬운 일로 나뉜다. 필자의 경우 어려서 잘한 일은 부모님 말씀에 순종한 일이다. 커서 잘한 일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일이다. 후회되는 일은 불순종이다. 아쉬운 일이라면 좀 더 열심을 내지 않은 것이다.
결국 인생의 복과 화를 만드는 단어는 순종과 불순종이다. 사무엘은 불순종한 사울 왕에게 더 이상 왕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즉 불순종하는 사울에게 그가 비록 전쟁에 승리하고 왔지만 단호하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왕의 권세를 빼앗아 버린다.
만약 하와가 뱀의 유혹을 이기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면 선악과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뱀의 유혹의 주제는 불순종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과연 그럴까?'라고 한 것이다. 눈이 밝아진다, 하나님처럼 된다고 유혹한 것이다. 순종은 진리이고, 불순종은 욕심이다. 자녀들이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그것은 성공의 길로 가는 것이 인생의 진리이다. 그러나 불순종하면 실패의 길로 가는 지름길이다.
왜 하나님은 순종에 대해 복을 주시고 불순종에 대해 복을 거두실까?
불순종의 뿌리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욕심'이고 다른 하나는 '의심'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은 하와의 욕심이 하나님을 의심하게 된 것이다. 내 맘대로 살고 싶은 욕심으로 만약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떠나는 것은 순종이고 떠나지 않은 것은 불순종이다. 순종의 다른 말은 행동하는 믿음이고, 불순종의 다른 말은 자기 욕심이다. 사울은 욕심을 부린 것이다. 사울은 '전쟁 하느라 내 목숨을 걸고 싸웠는데 어찌 승리를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만 하는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이라고 했다.
본문은 이삭이 복을 받는 내용이다. 대신 이삭도 순종하라고 하신다. 순종을 통해서 이삭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받게 된다.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순종의 결과는 복이었다. 순종의 결과는 안전이었다. 순종의 결과는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었다. 순종의 결과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불순종의 사울은 죽은 믿음이고, 순종의 다윗은 산 믿음이다. 순종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이다. 하나님은 산 믿음의 성도와 동행하신다. 순종은 하나님의 약속된 말씀을 따라 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믿음의 복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복된 성도는 먼저 순종을 배우고, 순종하는 성도인 것이다.


오늘의 기도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의 길로 나아가 복받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조진현 목사
전주 새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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