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올 미래의 리더십 ④평신도의 리더십

다가올 미래의 리더십 ④평신도의 리더십

[ 특집 ]

곽신환 교수
2018년 03월 21일(수) 15:15

지금의 중국 호북성 북쪽에 춘추시대에 수(隋)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의 계량(季梁)이라는 대부가 그 제후에게 복을 받으려면 신(神)을 속이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당시의 제관 가운데 축원하는 사람(祝)과 신의 뜻을 선포하고 기록하는 사람(史)이 정직하지 않다고 보았다. 백성은 굶주리고 있는데 제관들은 풍성한 제물을 마련하고 미사여구로 가득찬 거짓 제문을 지어 신에게 아첨하고 제후와 백성을 기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량은 이어서 "백성이 신의 주인입니다"라고 하고, 오직 정직한 마음의 정성과 백성을 아끼고 가까이 하는 것이 복받는 길이라고 했다. 백성이 신의 주인이라는 말의 원문은 "부민, 신지주야(夫民, 神之主也)"이다. 이 말은 제사와 예배의 본질 규정에 있어서 엄청난 방향 바꾸기였다. "신은 민의 주인입니다(夫神, 民之主也)가 일반적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계량의 생각은 천동설(天動說)이 지동설(地動說)로 바뀌는 듯한, 그래서 가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회(轉回)라 할 수 있다.

16세기 조선의 어느 아버지는 아들에게 최고로 거룩한 왕 곧 성왕(聖王)의 신하가 되라고 하였다. 당시 동아시아 사회에서 가장 거룩한 왕은 순(舜)이었다. 그래서 아들의 이름이 순신(舜臣) 즉 순임금의 신하가 되었다. 이 사람은 훗날 선조의 신하가 되었지만 판단이 어려운 상황마다 선조의 명령을 지상명령으로 여기지 않고 순이라면 지금 어떤 명령을 내릴까를 생각하였다. 

그가 때로는 과단성있게 선조의 명령을 거역했던 이유였다. 현실의 지존자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대가는 혹독했지만 어리석은 왕의 신하가 아니라 성왕의 신하가 되는 길을 선택했기에 그는 나라와 백성을 구하였고, 훗날 성웅(聖雄)으로 칭송되고 있다. 그에게서 성왕인 순의 명령은 하늘의 명령이요, 백성의 명령이며, 그들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스스로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당당하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을 갖지 못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사람은 죄를 지은 피조물 아담의 후손들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오랜 세월 전통이라는 권위로 율법이라는 타율적이고 절대적인 제약적 지침이 주어져 죄의식 가운데 살고 있었다. 그런데 목수의 아들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자기 생각이 아버지의 생각이고 아버지가 자기 안에 있으며 자기는 아버지의 뜻을 어기지 않을 뿐 아니라 아버지도 자신의 뜻과 어긋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이런 태도와 의식은 당시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가 자기민족들로부터 신성모독으로 로마법정에 고소당하는 주된 이유가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였다.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원수를 사랑하고 선히 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꾸어 주는 자가 또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된다고 하였다. 

바울은 예수의 이 정신을 이어서 무릇 하나님의 영(靈)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는 주인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아들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아들의 상대 개념은 남이거나 종이나 머슴 노예일 것이다. 아들이라면 곧 하나님의 상속자이며 이 점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동격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과 더불어 예수님은 우리가 율법 아래 있었다는 것, 타율적 구속 아래 있었던 존재임을 환기하면서도 거기서 나아가 원수를 사랑하는 적극적 자율적 창조적 윤리를 제시하였다.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주어지는 명령을 두려워하는 종이 아니라 자유의지로 스스로 행동할 수 있는 자녀의 신분으로 살아야 할 것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율법에서 용서와 사랑의 윤리로 나아간 것은 종처럼 섬기며 처분만 바라는 자에서 상속자며 재량을 행사하는 아들의 신분으로 바뀐 것에 따른 자연스런 귀결이다. 그리고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상속자로서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왕들이 아직 세상에 남아 있기는 해도 대부분 이미 화석(化石)과 같은 존재라서 사람들은 과거의 신민(臣民)들처럼 더 이상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의 신앙과 예배형식에는 아직도 전제 군주시대 가치관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어느 누구랄 것 없이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우리의 행동이나 의식은 자녀와는 거리가 멀다. 마치 여전히 지난 날의 충성을 맹세하던 신하이고 그 백성이며 병사들 같다. 그리고 그렇게 처신하면 신앙이 깊다거나 좋다고 평가한다. 정녕 예수님은 우리가 왕으로 부르길 원하실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로 살라고 그렇게 일깨워 주셨는데 신하나 병사나 종의 의식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매사 지침을 내려주기를, 처분만 기다리거나 복 내려주기를 기도한다면 좋아하실 것 같지 않다.

규모에서 또 세련됨에서 오늘의 우리의 예배는 거의 극치에 이른 듯하다. 화려한 시설, 높은 기량의 찬양대, 세련된 진행, 많은 헌금, 다채로운 프로그램 등. 그런데 우리의 기도는 진실한가? 강단에서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지향을 갖고 있는가? 교우들의 속된 바램에 은근히 영합하고 있지는 않는가? 사람의 테크닉에 지나지 않음에도 그것에 아멘의 화답을 강요하지는 않는가? 교회에서 하는 각종 다양한 형태의 부대사업은 불가피한가? 선조의 신하였던 이순신이 순의 신하이고자 했던 것처럼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은 매 순간순간 하나님의 아들임을 의식하고 행동하고 처신하여야 한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의 카리스마에 좌우되거나 하나님의 권위를 빌린 인간적 체계에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길을 걸어서는 안된다. 모든 사역자는 협력자이지 또 다른 우상화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예수님과 우리는 형제, 스승과 제자, 나를 위해 목숨까지도 버린 친구, 그리고 리더와 팀원 사이라고 한다면 망발일까?

곽신환 교수
한국기독교문화연구원장ㆍ숭실대